몰랐던 궁궐 벽지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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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랐던 궁궐 벽지의 세계

엘르 2025-03-24 00:00:02 신고

이토록 화려한 궁궐 도배지의 세계
장순용, 장필구, 이지영





건축사 장순용은 지금으로부터 30년 전 궁궐 벽지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1993년 운현궁 실측조사를 맡았는데, 현장 도배지를 채취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은 것이다. 문화유산의 일부를 개인이 ‘채취하도록 허락했다’는 표현이 어색하게 들릴 수 있으나 당시 궁궐에서 도배지가 갖는 위상이 그 정도였다. 1980~1990년대는 궁궐 복원 공사가 활발히 진행된 때다. 하지만 벽지는 복원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고, 뜯어낸 벽 위로 멀건 한지가 발렸다. “도배지 문양이 완연하게 드러나는 경우가 있어도 사대부 집처럼 한지로 마무리되는 것이 일반적이었어요. 왕실 건축물에서 실내 의장의 마지막 단계인 도배가 생략되고 일률적으로 마감하는 것이 이상했죠.” 궁궐 밖을 나온 도배지는 장순용 건축사의 집 욕조로 향했다. 물에 불린 벽지를 한 겹 한 겹 분리한 다음 A3 켄트지에 차곡차곡 붙였는데, 하나의 덩어리에서 열 가지 이상의 도배지가 나오기도 했다. 고이 모아둔 도배지들이 가치를 인정받기 시작한 건 그로부터 몇십 년도 더 지난 후로, 장순용 건축사의 아들이자 한국 건축 역사를 연구해 온 장필구 교수와 그의 아내이자 공간 디자이너인 이지영 박사가 본격적으로 궁궐 도배지를 연구하면서부터다. 약 11년 전부터 도배지를 분석해 온 두 사람은 그간의 연구 자료를 토대로 올해 3월까지 서울공예박물관에서 열린 〈공예로 짓는 집〉전에도 참여했다. “아버지가 모은 벽지를 마냥 신기하게만 보던 시절도 있었죠.” 장필구 교수가 처음부터 도배지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건 아니다. 왕실 건축 복원과 일제강점기 전후 변화를 연구하며 벽지가 조금씩 연구 대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궁궐 내부도 여느 건물처럼 사용자의 취향과 주변 상황에 따라 변화해 왔는데, 도배지는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였다.




2020년부터 시작된 대조전과 희정당 관람 환경 개선 공사는 벽지의 가능성을 다시 확인하는 계기가 됐다. 희정당 일곽에서 총 64점 35종의 벽지가 확인됐고, 이 중 건립 당시 최초 도배지의 정확한 위치가 확인되는 부분에 11점의 벽지를 재현 시공했다. 곳곳에 형형색색의 문양과 색을 입은 희정당의 모습은 낯선 과거의 미감을 생생하게 전달했다. “서양 문양이나 색감도 우리 궁궐의 공간과 잘 어울리더군요. 세상에 좋은 것들을 다 갖고 있는 궁궐에서 도배지를 하얗게만 쓰지 않았겠죠. 일제강점기 신문 기사나 사진 자료를 통해 조선에서 도배지가 널리 사용된 걸 확인할 수 있어요. 지난해에는 교토의 도배지 제작 업체를 방문했는데, 그곳에서 19세기 후반 운현궁에서 사용된 도배지와 같은 문양을 발견했습니다. 우리의 도배 문화가 한반도에만 제한되지 않고 국경을 넘나든 상황까지 짐작할 수 있었죠.” 정확한 실물이 남아 있지 않으나 한국 문양 도배지의 역사는 조선시대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불교 문화에서 유사한 문양이 발견되는 점으로 미뤄볼 때, 고려시대부터 문양 도배지를 썼을 수도 있다는 게 이지영 박사의 견해다. 특히 한국은 한·중·일 중에서도 실내 도배 비중이 가장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왕족이나 귀족 사이에서 문양 도배지가 발달했을 거라는 추론도 가능하다. 조선시대 초기 유교 문화에 접어들어 절제하는 분위기 속에서 문양 도배지는 제례 시설에만 사용됐으나 점점 궁궐과 민간으로 확산됐다. 장필구 교수에 따르면 조선시대 초기에는 사대부들의 과도한 문양 도배를 금지한 기록이 남아 있으며, 최근엔 종묘 정전과 성균관 대성전의 천장에서 청색 도배지가 공통적으로 발견됐다. 궁궐에서 문양 도배지는 왕실의 상징성과 권위를 드러내는 장치로 톡톡히 기능했다. 1990년대 창덕궁 석복헌에서 발견된 ‘청수오복문’(1848년 추정)이 그 예다. 목숨 수(壽)와 임금 왕(王)을 합친 문자 둘레에 오복(五福)을 상징하는 다섯 마리 박쥐가 있는 패턴으로, 도배지 바로 아래 조선시대 과거 낙방 답안지를 활용한 초배지가 발견됐다. 궁궐이 지어질 때부터 사용됐다는 뜻이다. 이지영 박사는 공간 자체에 기복을 바라는 문양이 사용됐다는 점도 한국적 면모로 해석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2010년 경운궁 준명당에서 발견된 ‘용봉문’(1907년 추정)도 마찬가지다. 이름 그대로 용과 봉황이 어우러진 이 패턴은 당연히 왕의 공간에 쓰였다. 실제로 같은 패턴이 경운궁 내 고종의 침전이었던 함녕전에서도 발견됐다.




장순용 건축사의 아카이브와 창덕궁 희정당 사례를 제외하면 조선시대 궁궐 벽지 실물 사례는 사실상 전무하다. 〈영건의궤〉(궁궐 건축에 대한 공사 과정을 기록한 보고서)에 벽지에 대한 언급이 있지만, 문양과 색을 포괄적으로 암시할 뿐 정확히 어떤 패턴이 어디에 적용됐는지는 실제 공간에 남은 흔적으로 유추할 수밖에 없는 실정. 몇 안 되는 사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근대 조선시대 궁궐은 생각 이상으로 다채롭고 화려했다는 점이다. 벽과 천장, 문틀과 창틀 등 구석구석에서 발견된 도배지가 이를 뒷받침한다. 벽지는 패턴의 정형성에 따라 귀빈을 대접하는 공적 공간과 침전 등의 사적 공간을 구분했을 뿐 아니라 천장부터 기둥 아랫단이나 상부, 장지문 안쪽의 고정된 갑창과 같은 세부 건축 요소를 장식하는 용도로 쓰였다. 특히 천장에서 화려한 벽지가 발견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지영 박사는 이 역시 한국적 감성으로 볼 수 있다고 한다. “서양식 벽지를 천장에 바른 게 지금으로선 어색해 보이나 당시 사람들은 천장에 특별한 감각을 더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단청만 봐도 그래요. 공간의 격을 높이는 방법처럼 인식했던 건 아닐까요?” 여태껏 발견된 궁궐 벽지만으로는 문양에서 한국성이나 디자인적 고유성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워낙 사료가 부족하기도 하지만, 도배지는 당대 ‘고급 기호품’으로서 주로 수입에 의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벽지를 선택하는 기준’을 살피는 일은 단순히 패턴을 분석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이지영 박사는 창덕궁 대조전 뒤편 경훈각에서 발견된 꽃 문양 벽지를 예로 들었다. “당시 영국에서 정원 분위기를 내기 위해 쓰인 꽃 문양 벽지가 순종과 순종비의 처소에서 발견됐어요. 심지어 바닥에는 연두색 카펫도 깔려 있었죠. 영국 가정에서 쓰이던 것이에요. 이 점만 놓고 보면 우리 왕실의 격이 낮아지는 느낌이죠. 하지만 당시 왕과 왕비는 일제에 의해 명목상 ‘조선의 왕’이라는 상징성만 있었기 때문에 가택 연금 수준으로 대조전 안에 머무는 시간이 대부분이었어요. 이런 상황을 감안하면 벽지가 다르게 보이죠. 벽지와 사람과의 관계에 집중할 때 새로운 발견이 가능해요. 벽지 하나가 한 편의 드라마처럼 다가오기도 하죠.” 장필구 교수는 한국의 근현대 주택에서 발견되는 벽지의 기원은 서양이지만 100여 년 전에 유입된 서양 벽지 패턴이 토착화되는 과정에서 많은 이야기를 살펴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한국인은 예부터 도배를 열심히 해온 민족이에요. 벽지는 개인이 기호에 따라 쉽게 공간의 이미지와 분위기를 바꾸는 데 유용했을 것입니다. 공간에 대한 사용자의 인식을 보여주는 중요 매체죠. 벽지를 통해 궁궐 전각과 근대 공간이 더욱 풍부하게 해석되고, 더 많은 이야기와 영감을 주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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